북조선과 다른 구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90년대 기본차이는 그 붕괴상에 있었다. 제 외국의 붕괴가 미래 지향적 재구조의 적극적 기회로 된 반면에, 북조선은 현실적 붕괴를 저지하려고는 한다고 하면서도 명백한 과거지향도 없이 소극적 "땜때기"를 계획하는 사이에 권력분할의 표면화와 사회무질서라는 련쇄붕괴가 초래, 부정부패가 이 기회를 적극 리용하여 기득권이 재구성되고 말았다.

권력 재통합과 사회질서 회복은, 외압의 도입 혹은 세대교체적 자연사 이외의 처방들을 거의 다 무효하게 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차후편들에서 사례를 들어 가며 설명하려고 한다. 다만 이 련쇄붕괴 과정에 유의의한 사회습관 (하비투스) 과 부정적 사회관행, 그에 대한 사회통제 결여는 여기서 간단히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

첫째로, 시초붕괴는 절대적으로 확립운영되여 온 유일 수령제가 무의미화된 것이였다. 이하 셋째에서도 약간 론하지만 수령의 후계는 실지로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그 수령제가 무의미하게 되였다는 것은, 생존하는 김일성주석 의 신임, 접견, 교시를 받아야 개인이나 기관의 운명이 결정되던 철저히 유물신적 인치구조의 장기간 구축운영이 총파산 됨을 의미한다.

있을수 있는 수령의 사망현실에 예비하는 국민정신적 및 국가제도적 대책이란 도저히 불가능하였고 령상태였다. 그럼에도 실지 수령은 사망하였고, 그 동시에 국민은 유일한, 수령에 의한 운명 결정제도를 일순간에 상실하였다. 그 중에서 제일 민감히 반응한 것은 핵심 간부계층이였다. 식량 배급제를 비롯하여 특히 말단행정제도들은 대지진을 만난것 같이 비가역적 완전파괴, 무질서에 빠지고 말았다.

둘째로, 이 수령제의 무의미화는 곧 국민의 운명 결정에 관한 사회적 관행의 종말을 의미하였다. 이로써 파생된 붕괴표현이 전사회 구성원들의 생사운명적 혼란, 즉 그 공통특징을 인격상실로 가지는 비사회성적 2대 집단분화 즉 위법자와 코체븨 대군의 발생이다. 절대적 수령의 사망은 대중에게서 사회의 의미도 박탈하였다. 략탈을 하든가 략탈의 대상으로 되든가 차례진 운명의 선고, 사회관계는 가혹하고 잔인하였다.

셋째로, 물론 대중이 새로운 정권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은 것은 아니였다. 우에도 썼지만 국민이 아는 수령을 후계하려면 후계자는 언제나 인민속에 있어야만 한다. 지위는 세습할수 있어도 권위는 세습할수 없다. 그 수령조차도 자기의 인민적 카리스마를 유산화할수는 없었던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북조선의 선거제도에 의해 피선은 되였지만, 김일성 주석과는 반대로 높은 울타리 안에 있는 인민도 모르는 고위간부들에게 과점적 존재, 인민에게는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환적인 존재이다. 그래도 인민은 이번 선거에서, 늘 선전하던 "세계최강" 국방이 아니라 파탄되는 경제를 책임지여 줄것을 수령의 후계자에게 절절히 기대하고 있었다.

사실 이런 절호의 정치적 기운야말로 인민적 카리스마 획득의 황금기회였다. 바로 40년전 김일성주석은 조선전쟁 휴전후 경제파괴상을 내각 수상으로서 복구하여 그 인민적 카리스마를 획득하였던 것을 잘 아는 북조선인민이였다. 그 마지막 정치적 기대의 저버림에 국민과 간부대중은 배신마저 느꼈다.

국민의 요망에 대답 회피로 지도부가 지지와 정당성을 상실한 것은 정치분야에로의 련쇄적 붕괴 확대, 특히 권력 분할을 표면화하였다. 국민은, 현지도부는 "말로는 수령제 고수를 내들지만, 행동상은 보수도 개혁도 없는 속수무책"이라고 단정하였다.
그 구체상은 차회들에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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