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전인 1997년 여름, 나는 중국 지린성(吉林省)의 한 농촌에서 야윈 모습의 조선 노인과 마주앉았다. 나이는 70세 정도. '손자에게 업혀서 강을 건너 왔다'고 말했다. 북한 함경북도에서 월경(越境)해 온 탈북 난민이었다.
기아(飢餓)로 아내와 딸을 잃고, 마지막 선택으로 그날 아침 중국으로 건너온 것이었다. '일본에서 온 기자입니다'라고 나를 소개하자 노인은 놀란 표정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며 '50년만이다、일본인을 만난 것은'라고 말했다.
북한 기아의 실상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마을을 떠나게 됐을 때, 노인이 갑자기 일본어로 말했다. '朕惟フニ我カ皇祖皇宗國ヲ...'(주1) 교육칙어(教育勅語)였다. '학교에서 조선말을 쓰면 일본인 교사에게 혼났다. 황궁이 있는 방향으로 매일 요배(遙拜)했다.
패전 후 만주에서 남하해 온 일본인 난민들의 후줄근하고 새카만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일본에 대한 기억을 말했다. 이것은 한국에서 노인들로부터 들은 체험담과 상사형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1,000 명에 가까운 북한 사람들을 취재해왔는데, 그들 대부분에게 있어 나는 '태어나 처음 만난 일본인'이었다. 닫혀 있는 북한을 방문하는 사람은 드물고, 당국에 의해 정해진 평양의 중심 코스를 벗어나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지방 도시의 서민에게 있어 외국인은 화성인과 같은 존재다.
바꿔 말하면 일본 사회에 있어서도 북한 민중은 불가시한 존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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