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당시 서울)에 있던 명문 조선권투클럽의 선수들이 한강에서 야유회를 했을 때의 기념사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김유창 씨. ‘KOREA’가 적힌 유니폼은 일본 선수권대회에서는 착용이 허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1933~1934년 경으로 추정.
경성(당시 서울)에 있던 명문 조선권투클럽의 선수들이 한강에서 야유회를 했을 때의 기념사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김유창 씨. ‘KOREA’가 적힌 유니폼은 일본 선수권대회에서는 착용이 허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1933~1934년 경으로 추정.

당시 조선인 권투선수는 어떤 생각으로 링 위에 올랐을까?
권투는 싸움이다. 속세에서 허용되지 않았던 '일본인을 때려눕히는 것'이 링 위에서는 허용되었다. 또한 링 위에서는 조선인에 대한 차별은 없었을까?

김 씨는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조선인이 강해졌기 때문에, 국제시합에 출전할 일본대표를 정하는 대회에서는 미리 조선인 선수의 우승자 숫자를 정하게 됐다. 넉아웃(K.O.)을 노렸기 때문에, 조선인 선수는 파이터 스타일이 많았다' 압도적이지 않으면 승리를 도둑맞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934년 극동선수권대회 대표결정전에서 조선 플라이급 대표 김유창 선수가 후에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하는 센슈대학 소속 나카노 치요토(中野千代人) 선수에게 패배한 경기가, 당시 요미우리신문에 실려 있다. 시합은 3라운드까지는 김유창 선수가 압도했지만 이해할 수 없는 연장전이 실시되어 나카노 치요토 선수가 판정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김유창 선수는 "판정을 이해할 수 없어 코치와 함께 대회 본부에 항의하러 갔는데, '조선인의 우승은 2명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라고만 들었다"고 회상했다.

국제경기에 식민지 사람이 줄줄이 나오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조선인의 민족의식 고양을 경계하는 모종의 '국책'이었는지, 그것은 알 수 없다. 이 대회가 열린 것은 독립운동가 윤봉길이 상해의 천황 탄신절 행사장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을 일으킨 지 2년 후. '만주'에서는 김일성 등에 의한 항일무장투쟁도 활발해지고 있던 시기였다.

1930년대 말, 일본군은 중국과 아시아 각지에 진출, 전선을 확대하고 있었고 일본인 남성은 점점 군대로 징집되어 갔다. 권투선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본의 링은, 조선인 복서가 그 빈자리를 지키는 듯한 모습이 됐다. 그리고 마침내, 국제경기에 나가는 대표팀 전원이 조선인 선수가 된 것이다.

김명곤 씨는 2000년 경에 타계했다. 앞서 언급한 필리핀 원정에서 경성(당시 서울)에 돌아간 뒤, 조선총독부에 취직한다. 이번 취재에서, 김 씨가 해방 직후 친일파라고 비판받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본인은 말하지 않았지만 조선총독부에서 경찰 관련 업무에 종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필리핀 원정 당시 감독이었던 황을수 씨는 한국 전쟁 때 월북하여 후에 북한 권투를 이끈 지도자가 되었다. 일본의 링을 석권했던 조선인 권투 선수들이, 분단 이후 각각 남북의 링을 이끈 것이다. (이시마루 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