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덕군을 방문하다
사진을 제공받은 이듬해, 나는 식량지원의 모니터링 활동에 종사하게 되어 은덕군을 방문할 기회를 얻었다. 현지는 매우 조용했다. 3일간 은덕에 머무는 동안 본 자동차가 3대에 불과했다. 굴뚝에서는 연기가 나지 않고, 망치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지역 주민들의 여윈 모습처럼 가슴이 아팠다.
시내 중심의 식량배급소를 방문했을 때, 갑자기 근처에서 큰 환호성이 울렸다. 돌아보니 근처 운동장에서 축구 시합이 벌어지고 있는 듯 했다. 어른도 아이도 운동장을 둘러싼 벽에 기어올라가 관전하고 있다. 3주 정도 북한에 체류했던 기간 중 유일하게 사람의 생기와 밝은 모습을 느낀 광경이었다. 축구가 고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한때의 안녕을 선사하고 있는 듯 했다.
은덕을 떠나는 날, 나를 담당해준 현지 간부에게 사진의 은덕 여자 축구팀이 어떻게 되었는가 물어볼까 했지만 단념했다. 중국으로 달아난 사람에게서 받은 사진이니 피해를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헤어질 때 그 간부는 눈물을 흘리면서 나의 손을 잡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은덕을 잊지 말고, 꼭 다시 와주세요"
나는 "네"라고 대답했지만, 그 이후 은덕을 방문하는 것도, 연락을 취하는 것도 할 수 없었다.
올림픽 예선 마지막 날. 북한과 일본 양팀 모두 본선 진출에 실패한 상태였다. 그래도 시합의 열기는 뜨거웠다. 탈북자인 친구는 조국의 여자 축구팀의 분투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 속에 조국을 떠올린 것 같았다.
"태어나고 자라, 조상의 뼈가 묻혀있는 곳이 나의 고향, 조국. 지금 정권에서는 무리겠지만, 언젠가는 돌아가고 싶다. 축구경기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계속 생각했습니다"
(이시마루 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