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고난의 행군
1994년 7월 사회 시스템의 중요 부분을 이루는 신격화, 절대화 극치의 일부였던 김일성이 급사하자 내부에 쌓여있던 정치, 경제적 모순이 한꺼번에 분출했다. 이 '김일성 쇼크'로 북한 사회는 패닉(panic) 상태에 빠졌다. 행정기능이 마비되고 질서는 흔들렸다. 국민이 식량과 접촉하는 합법적 수단이었던 식량 배급제는 거의 붕괴, 마침내 조선 역사상 최악의 대기근이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체제의 위기를 맞은 김정일 지도부는 1996년부터 '고난의 행군 정신으로 살며 투쟁하자'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북한 사람들은 이 대 패닉기를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른다. '고난의 행군'이란 항일 게릴라의 김일성 부대가 1938년 말부터 약 백일 동안 일본군에 쫓기어 산중을 방황한 일화에서 유래됐다. (본고에서는 '고난의 행군' 기간을 아사자가 대량 발생하기 시작한 1995년부터 일단 종식을 보였던 2000년까지로 구분했다)
'고난의 행군기' 사망자 수에는 여러 설이 있다. 최소 20~30만명, 최대 300만명 이상이라고 추정하고 있지만, 북한 당국이 통계를 전혀 밝히지 않고 있어 정확한 사망자 수는 불명이다.※1
북한 정부는 아사자 발생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원인을 큰 비에 의한 홍수나 가뭄으로 농업 생산이 저하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1995년 국제 사회에 인도적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사실은 사회 패닉에 의해 농업 생산과 유통을 포함한 계획경제 체제의 기능 마비가 단번에 확산돼 사람들이 식량에 접촉하지 못하는 사태가 한동안 지속됐기 때문이다. 아사자 대부분은 도시 주민이었다. 유일한 합법적 식량 접촉 수단인 식량배급이 중단됐기 때문이었다.
배급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계속해서 죽어 가는 것을 본 도시 주민들은 비합법 장사에 나선다. 초기에는 농촌에 나가 가재 등을 식량과 교환해 도시로 운반하거나 근무하는 공장의 기계를 스크랩하여 고철로 팔고, 빵이나 떡 등의 가공 식품을 만들어 파는 따위의 행위에 나섰다. 비합법적인 암거래 장사는 배급이 두절된 국민의 상당수가 참여함으로써 단번에 확대된다. (계속)
※1: 1997년 2월에 한국에 망명한 고위층인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는 농업 통계와 식량문제를 담당하는 간부로부터 들은 이야기라며 "1995년. 5만 명의 당 간부를 포함해 약 50만 명이 아사했다. 1996년에는 약 100만 명이 아사했다고 추정된다", "만약 전혀 국제원조가 제공되지 않으면 1997년에는 200만 명이 굶어 죽을 것"이라고 저서 '북한의 진실과 허위'(광문사1998년)에 적고 있다.
재일조선인 연구자인 문호일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인구 변동--인구학에서 해석하는 조선사회주의'(明石서점 2011)의 인구 통계에서 1995~2000년의 기근 피해를 33만 6000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대학 교원 및 국가 프로젝트의 엔지니어를 역임한 지식인 탈북자 한정식은 이시마루(石丸)와의 2004년 인터뷰에서 "95~98년에 적어도 인구의 10%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노동당은 파악하고 있다고 당 간부로부터 들었다. 자신의 실감으로도 도시주민 인구의 1할 이상이 이 기간에 사망했다고 생각한다"라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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