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난으로 평양 축소에 나서
평양시의 인구는 1970년대 전반까지는 약 80만 명 정도였다고 되어있었으므로 현재는 3배로 는 것으로 된다.
"평양 인민위원회에 있는 도시 계획 설계 연구소의 강조항 기사장(45)이 말한 도시계획 기본의 첫째는 평양의 인구 규모를 80만 명 이상 넘기지 않는 것. 이를 위해서는 인위적으로 인구 집중을 막자라는 것이었다"(일본재단 도서관 웹페이지에서 소개된 1971년 11월 17일 아사히 신문 석간)
북한 정권은 평양의 인구를 억제에서 확대 허용하는 정책으로 전환한 것으로 보이지만, 인구 증가는 식량, 물, 전기, 교통, 쓰레기 처리 등의 문제가 생겼다.
북한에는 거주지 선택, 이동의 자유가 없다. 그래도 평양에 인구 유입이 지속되어 왔다. 여기저기에 뇌물을 써 평양에로의 이주를 목적하는 주민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평양시민이 되는 것으로 '특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은 배급. 배급 중단은 다반사인데 평양시는 지역적으로 북한에서 유일하게 식량 배급이 유지되고 있다. 이 외에도 맥주나 된장, 간장, 콩 우유(학교) 등의 배급이 간신이 유지되고 있다. 또 전기 공급도 타 도시보다 훨씬 좋다.
더욱이 인구가 많아 시장이 크므로 장사에 유리. 간부나 유력자와 연줄을 만들 기회가 많다. 대학이나 언론사 등 교육, 문화 시설이 집중돼 있고 교육 수준이 높다. 교통, 전기 등 사회 자본 투자가 집중되어 있어 지방 도시와 같은 불편점이 없는 등 장점이 있다. 따라서 지방에서 평양으로 이주를 희망하는 사람이 많아 직장 배치, 전근, 진학 등의 기회에 어떻게든 평양행을 하려고 뇌물을 쓴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평양 우대는 정부에 막대한 재정 부담을 지웠다. 각종 배급과 공공 교통기관의 국정 요금은 실질적으로 공짜. 즉 대규모 적자를 내며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심각한 재정난에 허덕이는 정부는 부담 저감을 위해 수도의 일부 분할을 단행했다. 2010년 전 김정일 정권은 승호구역, 강남군, 상원군, 중화군을 평양시에서 분리해 황해북도에 편입시켰다. 이로써 30~50만 정도의 시 인구가 감소한 것으로 보인다. (강남군은 2011년에 평양시에 다시 편입됐다)
"먹여줄 수 없으니 입을 줄였다고 평양에서는 알려졌다. 중화군의 지인에 물으니 갑자스런 결정을 들은 주민들이 어리벙벙해 울거나 직장에 출근하지 않기도 했다고 한다"라고 전출의 구광호 씨는 말했다.
다음 회는 평양에 사는 사람의 구체적인 삶에 대해 기록한다. (계속)
<평양에서 볼 수 있는 것, 보지 못하는 것> 기사일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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