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사진) 이것은 단기 강제 노동 캠프인 '노동 단련대' 수용자가 열을지어 노동 현장에 향하고 있는 모습이다. 2005년 6월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촬영 리준(아시아프레스)

 

상상을 초월하는 '12호 교화소'는 마치 죽음의 형무소

전거리 교화소는 중국 국경에 수십킬로 정도 떨어진 산간에 있다. 중국에 월경(越境) 후 송환된 사람이 많아 6할 정도를 차지했다. 이외 밀수나 금지된 한국 드라마의 비디오를 본 사람, 각성제 사용자도 있었다고 한다.

"수감동에는 남자가 2,000명, 여자는 600명 정도 있었습니다. 좁은 방에 빽빽히 가득 밀어넣어 자다가 몸을 돌릴 수도 없는 정도였습니다. 남자는 인근의 동 광산 채굴과 목공 일, 여자는 목공과 가발 만들기. 생산품은 중국에 수출한다고 합니다. 농작업도 시켰습니다. 여성 수감자도 매를 맞습니다. 맞아 다리가 부러져 불구가 된 사람도 있었습니다"

영양실조와 위생 상태가 나빠 병에 걸린 사람이 많아 계속해서 사람이 죽었다는 증언에는 숨을 멈췄다.

"옥수수를 통째로 갈아 만든 밥이 한끼에 150그램 정도 나왔는데 중노동을 시키니 배고파 죽을 지경입니다. 찬은 없고 소금 국만"

은숙 씨에 따르면 간수는 뱀과 쥐를 잡아 삶아 먹거나 구워 먹는 것을 장려하고 있었다고 한다. 수감자가 죽으면 책임을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전거리 교화소 위성 사진. 중앙부가 수용동(구글 어스)

 

'하루에 3명은 죽었다...'

"3일에 한 번 남자 죄수가 시체를 10구 정도 모아 짐수레에 싣고 가까운 산에 운반합니다. 시체는 태워 재를 버립니다. 가족에게도 통보하지 않습니다. 전염병과 굶주림으로 하루 평균 3명은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루 3명이라면 1년에 1,000명을 넘는다. 믿겨지지 않아 은숙 씨에게 몇 번이나 되물었지만 "정말입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죽은 사람이나 출소자와 교대하는 것 처럼 새로 사람이 계속 들어왔다고 한다.(거의 같은 내용을 전출의 한국 두 연구소가 보고하고 있다)

몇 년의 형기를 마치고 풀려난 은숙 씨는 반생반사(半生半死) 상태였다고 그녀의 어머니가 전했다. 우리와의 전화 통화 끝에 은숙 씨는 이렇게 말했다.

"나를 한국에 데려가 주실 수 없어요? 이제 이 나라에서는 못 살겠어요"

김정은 시대가 된 지금도 인권 상황의 개선 조짐은 없다. 핵무기와 미사일만 주목 받고 있지만, 이웃 나라의 국민이 심하게 유린되고 있는 현실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은숙 씨의 상세한 증언에 대해서는 이후에 보고한다. (이시마루 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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