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타에서 귀국선을 타는 재일조선인. 아이들과 중고생의 모습이 눈에 띈다. 대체 북한에서 어떤 삶을 살았을까. 1961년 촬영. 故 양영후 씨 제공

◆체포된 아들의 시신도 보여주지 않아

탈북해서 지금은 한국에 사는 박 씨를 7월 8일 오사카에 초청해 체험담을 듣는 행사를 동료들과 함께 개최했다. 박 씨의 증언을 소개하고자 한다.

"조선의 경상도에서 히로시마로 온 아버지는 제재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전후 사업이 잘 되지 않아 동생이 고등학교에 갈 돈도 없었습니다. 조선총련의 간부가 집을 방문해서, 북한에 가면 공부를 할 수 있다고 열심히 권해서 부모님이 귀국을 결심했습니다. 북한에 가보니, 춥고 배급 식량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한데다 옷에서부터 비누까지 모든 물건이 모자라서 '이런 곳에서 사는 것인가'하고 실망했습니다"

10명의 형제자매 중 8명이 북한에 건너갔다. 일본에 남은 오빠가 고생해서 매년 보내준 돈을 형제가 나누어 생활했다. 하지만 생활이 안정된 70년대 중반, 오빠 2명이 잇따라 정치범으로 체포됐다.

"한 명은 통근 도중에 끌려가서 그대로 연락이 끊겼습니다. 왜 체포되었는지, 어디에 수감돼 있는지 생사도 모른 채입니다. 일본에서 송금이 있었으니까, 돈을 뺏기 위해 정치사건을 꾸며낸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표적이 된 재일귀국자가 많았습니다"

불행은 계속된다. 80~90년대에는 아들 두 명도 정치범으로서 체포됐다. 차남은 조사 중에 사망했는데, 시신을 보는 것도 거두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박 씨 가족은 지방농촌으로 추방되어 감시대상이 된다. 90년대 후반 북한에서는 전대미문의 사회혼란이 일어나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게 됐다.

"이제 이곳은 사람이 살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다"

박 씨는 그렇게 판단, 일본에사는 친척의 도움으로 북한을 탈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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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처럼 탈북한 귀국자는 도쿄에 150여 명, 오사카에 50여 명, 한국에 300명 정도가 살고 있고 고령화가 진행 중이다. 재일귀국자가 북한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기록을 남기기 위해 '북한 귀국자의 기억을 기록하는 모임'을 설립했다. 일본과 한국에서, 탈북한 귀국자들을 만나 상세한 청취 작업을 하는 것이 목적이다.

1950~60년대, 많은 재일조선인이 차별과 빈곤에 시달렸다. 조선총련은 사회주의 조국에 돌아갈 것을 호소, 자민당에서 공산당까지의 정당이 인도문제라고 해서 귀국을 지원했다. 말하자면 일본사회 모두가 9만 3천 명의 등을 밀어 귀국선에 태운 것이다. 하지만 그사람들이 북한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공백인 채이다.

역사는 사람의 기억과 기록의 집적(集積)이다. 귀국자들의 기억을 역사에 새기는 작업을, 재일코리안과 일본인이 협동으로 짊어지고 나갈 계획이다.
(연락처는 1959kikoku@gmail.com)

참고기사 : 일본에 사는 탈북자 200명, 신원도 밝히지 못하고 더욱 고독해져 (이시마루 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