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2일, 고베시 출신 납치피해자・아리모토 게이토(有本恵子) 씨는 59세가 됐다.
연령이 비슷하고 같은 간사이 출신자로서, 매년 1월 보도되는 아리모토 씨의 생일 뉴스를 들을 때마다 안타까운 심정이다. 사도가 섬에서 납치된 소가 히토미(曽我ひとみ) 씨 가족의 도일(渡日)이 실현 된 2004년 7월 이후 역대 어느 정권도 납치문제를 진전시키지 못하는데도 게이코 씨와 부모의 시간은 계속 흐르기 때문이다.
일본이 정치와 외교를 잘 했다면 사태는 진전되지 않았을까? 보도는 더욱 도움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 오히려 보도가 교착의 원인 중 하나일까? 그런 망설임이 사라지지 않는다.
2002년 9월 김정일이 일본인 납치를 인정하고 '8명 사망 4명 미입국'이라고 공표한 후, 일본 사회에는 북한에 대해 보복・징벌하자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되갚아라', '북한 목을 졸라라'라는 말이 미디어에서도 난무했다. 협의가 우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매국노', '북한에 아첨하는 놈' 취급 당하기도 했다.
위세 좋은 말만 목청껏 외치는 정치가도 적지 않았다. 니시무라 신고(西村眞悟) 중의원 의원과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郎) 도쿄 지사(모두 당시)는 '일본이 경제 제재 하면 북한은 붕괴하고 납치 문제가 해결된다'라는, 황당무계하고 무책임한 주장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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