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북한에서 국가의 공식 출판물이 아닌 사적 교재 인쇄물이 유통되며 인기를 끌고 있다. 극도로 엄격히 인쇄를 통제하는 북한에서, 어떻게 사적인 인쇄물이 유행하고 있는 것일까? ‘사교육 시장’을 중심으로 확산하는 불법 인쇄물의 성행 원인과 배경은 무엇인가. (강지원 / 전성준)
◆ 노골화되는 불법 과외용 교재 인쇄물 유통
지난 8월 말, 북한 양강도 혜산시에 거주하는 취재협력자가 북한 내에서 국가의 승인을 받지 않은 비공식 출판물들이 거래되고 있다고 보고해 왔다. 주로 학습지 형태의 인쇄물이고 대학 입시생들을 위한 학습자료로 쓰이고 있다며, 인쇄할 수 있는 권한이나 조건이 있는 사람들이 돈벌이 목적으로 이 같은 인쇄물을 찍어낸다고 협력자는 전했다.
“김일성대 졸업생들이나 수재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단속을 피해 자체로 학습지를 만들어 인쇄해서 특정 학생들에게 돈을 받고 판매하는데, 그걸 받자고 줄을 설 정도이고 간부 자녀들이 많이 산다고 해요”
물론 과거에도 이 같은 사례가 존재했다. 하지만 최근 보고되고 있는 현상들이 의미심장한 것은, 무허가 인쇄물에 대한 단속이 매우 엄격한데도 이러한 비공식 인쇄물이 경제적 이익이나 좋은 학교 진학과 같은 북한 주민들의 보편적 욕망을 건드리는 방식으로 시장에 녹아들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에서는 인쇄기와 복사기를 철저히 관리한다. 기업과 조직, 학교 등에서 인쇄할 때는 아무리 소량이라도 몇 단계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자물쇠로 잠긴 복사기도 드물지 않다. 소형 프린터의 개인 소유는 일절 인정되지 않는다. 불법 무허가 인쇄가 적발되면, 정치 사건이 될 가능성이 있다.
역대 정권은, 국민이 정권이 관리하지 못하는 매체를 만드는 것을 철저히 금지해 왔다. 이유는 물론 자유로운 정보 유통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협력자가 전해 온 사적인 교재는 대체 어떻게 인쇄했을까? 아마도 뇌물을 써서 기업 등 조직의 인쇄기를 비밀리에 사용했거나, 개인이 은밀히 숨겨둔 소형 프린터로 인쇄했을 것이다.
◆ 한 달에 교사 월급의 100배 상당 매출
협력자에 따르면, 주로 영어, 외국어, 수학, 물리, 화학 등 대학입시를 위한 주요 과목을 중심으로 학습지를 직접 만들거나, 평양에서 돈을 주고 구입한 외국 학습지를 본인들이 재편집하여 학생들에게 판매하는 방식으로 유통된다.
“보통 외국어의 경우 20~30페이지짜리가 35000원인데 한 달에 1~2회 정도를 판매한다고 해요, 아무나 살 수 있는 게 아니고 전문적으로 배우고 싶은 대상에게만 주문에 따라 판매하는 형태라고 해요”
*북한돈 1,000원은 한화로 약 160원이다.
만약 한 달에 두 번, 25명에게 교재를 팔았다고 하면 매출은 175만 원(한화 약 28만 원)이다. 이를 시장의 암거래 가격으로 계산하면 백미 343kg분(11월 현재 1kg는 5100원), 지난 몇 년간 많이 오른 중학교 교사 월급의 100배나 된다.
◆ 이것이 어떻게 가능해졌나?
취재협력자는 이 같은 학습지를 구하려는 학생과 학부모가 줄을 서있는 상황이라고 전해 왔다. 학습지에 대한 수요가 많고 공급의 동기도 있으니 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학습지는 반국가적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 리스크도 상대적으로 낮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이를 단속해야 할 사람들은 곧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이러한 모순은 단속이 실질적 효과를 발휘할 수 없게 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OO동에 부자들이 많은데, 거기에 학습지를 파는 김대(김일성종합대학) 졸업생이 있는데 16명을 전문적으로 관리한다고 해요. 이용하는 게 대부분 간부 자녀나 돈주들이라서 단속 때문에 유출도 하지 않고 본인들만 봐서 문제는 없다고 해요”
불법인쇄물 단속을 강화하라는 지시가 내려와도, 자녀 교육을 위해 로동당, 행정, 법 통제기관 간부 자녀들이 유명 학습지를 주기적으로 받을 수 있는 과외선생님들에게 줄을 서 있는 상황이라 단속의 의미가 없다는 것이 협력자의 설명이다.
◆ 불법 인쇄물 거래의 의미는?
그렇다면 이 같은 현상은 북한 사회에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사적 인쇄물의 시장화라는 시각에서 이러한 현상은 북한 주민들 사이에 지적 재산, 즉 활자가 돈이 될 수 있다는 근본적인 인식을 제공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된다면 북한 당국이 다시 활자를 독점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마치 북한에서 마약이나 불법 외환 거래가 강력한 단속에도 불구하고 절대 근절되지 않는 것과 비슷한 논리이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의미는 이러한 현상이 북한의 중상류층 사이에 정보가 공유되는, 일종의 지식 유통망을 형성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현재는 단순히 돈을 벌고자 하는, 지식 제공자와 좋은 대학교를 가서 출세를 꿈꾸는 야심 찬 수험생들의 욕망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에 불과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지식과 정보가 유통되는 견고한 시스템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매우 고무적이다. 유통하는 정보의 내용에 따라서 그 시스템은 무엇이든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 아시아프레스는 중국 휴대전화를 북한에 반입해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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