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변에서 방호복을 입고 제방 복구작업을 하고 있는 북한 주민들. 2020년 10월 양강도 혜산시를 중국 측에서 촬영 아시아프레스
<북한 칠흑의 4년을 비추다> (1) 거의 유일한 탈출 루트 - 바다를 넘어온 신세대 돈주들이 말하는 코로나, 혼란, 사회변화

북한주민이 겪어낸 팬데믹이 과연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북한 내부의 팬데믹 경과를 살펴보려 한다. 이를 통해 4년 여의 봉쇄 기간 어떤 사건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주민과 사회에 영향을 미쳤고, 그로 인해 무엇이 변했는지를 추적한다. 본 기사에서는 국경 봉쇄로 시작된 팬데믹의 초반상황에 대해 집중적으로 알아본다. (전성준)

◆ 봉쇄, 연쇄적 비극의 시작

2020년 1월, 북한은 국경을 전면 봉쇄하고 강력한 방역체계에 돌입했다. 당국이 그 어느 나라보다도 먼저 강력하고도 철저한 국경 봉쇄를 강행한 것은 의료 기술과 자원이 열악한 상황에서 코로나바이러스가 체제유지에 치명적일 수 있다는 현실적 판단의 결과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시아프레스는 2020년 말, 북한 당국이 ≪절대비밀≫로 지정한 문서를 입수했다.

절대비밀 지정 문건《2월27일 당중앙위원회 확대회의에서 하신 김정은동지의 말씀》의 표지. 사진 아시아프레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 주체109(2020)년 2월 27일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하신 말씀”이라는 제목의 문서에 따르면, 팬데믹 초기였던 2020년 2월에 김정은은 “체온기도 제대로 생산하지 못하”“소독약 대신 쑥을 태우”는 자국의 열악한 방역체제에 대해 “물질기술적수단이 령이나 같다”고 개탄하며 코로나바이러스의 국내유입에 극단적 경계심을 드러낸다.

“… 보건부문의 물질기술적 토대가 충분히 갖추어졌다고 하는 나라들에서도 어쩌지 못하고 있는 신형코로나비루스 감염증이 우리나라에 류입되면 그 어느 나라에서 보다 더 큰 재앙이 초래되게 된다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절대비밀 지정 문건에 나온 김정은의 발언. 사진 아시아프레스

국경에 대한 전면적이고도 철저한 봉쇄는 김정은 정권의 이 같은 경계심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이는 이어지는 재앙의 기폭제가 되었다. 국경이 막히면서 북한 전체 대외무역의 95%를 상회하는 중국과의 교역이 거의 중단되었다. 중국의 세관에 해당하는 해관총서의 통계를 보면, 2020년 3월 북한의 대중 수출은 61만 달러, 수입은 1803만 달러로 각각 전년 동기에 비해 96.2%, 90.8%나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방역 관련 의료, 의약 품목들이 포함되었음을 감안하면 통상무역은 사실상 거의 단절에 가까웠다.

북한의 대중무역액 추이. 국경봉쇄로 팬데믹 시기 대중 무역액은 급감했다. 아시아프레스

대중 무역의 급감은 즉각 허약한 북한 경제의 밑바닥을 드러냈다.

◆ 물가 폭등에 바늘 하나 사기도 어려워

봉쇄로 국경이 막히자 시장(장마당)과 상점에서 중국물품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소비품을 중국 상품에 의존하던 북한 주민들은 곧 물품부족을 실감하기 시작했고, 이는 물가 폭등으로 이어졌다.

2020년 2월 7일, 아시아프레스의 양강도 혜산시 취재협력자는 당시 현지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해왔다.

“장사꾼은 절반으로 줄었다. 중국에서 생필품이 들어오지 않아 판매할 물건도 없고 가격이 급등하고 있다. 식료품 외에 다른 물건은 사려고도 안 해 시장이 한산하다.” 

국경을 차단하고 불과 일주일 정도 지난 시점의 상황이다.

<북한내부> '시장에 물건이 없어졌다' 주민 비명, 신종 폐렴으로 국경 봉쇄… 당국은 가격 인하 강요

2023년 10월, 딸 강규린(여, 23세)씨와 함께 동해로 탈북한 김명옥(여, 54세)씨는 당시 그녀가 살던 함경남도 중부 지방 도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억한다.

“장마당 나가 보니까 상품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도대체 시계약(건전지) 하나도 만 오천 원, (코로나 전에)천 원짜리 시계약이 만 오천까지 올라갔어요.”

※ 북한돈 1000원은 한화로 약 80원이다.

2023년 5월, 황해도에서 서해로 배를 타고 가족과 함께 탈출한 김충열(33세, 남) 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돈이 있어도 물건이 없는 거예요. 중국에서 상품 수입이 금지되다 보니까 진짜 바늘 하나, 여성들이 쓰는 초보적인 위생대(생리대)까지도(없었어요). 정말 고통스러웠어요.”

김명옥 씨는 라이터돌도 없어서 국내산 성냥을 썼다며 “그만큼 안타까운 게 어디 있어요. (품질이 안 좋아서)불 한번 켜려면 쭉쭉 쪼개져 나가고, 조금만 써도 다 없어졌어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는 긴 고난의 시작에 불과했다.

◆ 질식하는 시장, 숨막히는 인민 '코로나는 악몽'

더 큰 고통은, 방역으로 인한 시장 정체로 현금 수입이 급감한 주민들의 생존 자체가 위협당한 것이다.

1990년대 중반 극심한 경제난으로 배급체제가 거의 붕괴된 이래 주민들은 자연적으로 발생한 지역시장을 중심으로 생계를 꾸려왔다. 그후 지난 30년간 시장은 그 규모와 다양성이 크게 확장됐고, 시장이 주민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은 훨씬 커졌다.

강규린 씨는 코로나 이전의 사회의 전반적인 생활 형편이 상대적으로 좋았기에 추락이 더 크게 느껴졌다고 말한다.

“주변에서 접촉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돈 많고 하니까, 그냥 우리 사회가 이렇게 해서 쭉 발전해 갈 걸 믿고 있었어요. 그런데 코로나가 믿음을 바꿨죠”

중국에 대한 수입 의존도가 극단적으로 높던 북한이 국경을 봉쇄하면서, 중국 물품 수입을 담당하던 무역회사와 국경 지역의 밀수꾼들의 손발이 묶이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는 이들을 통해 상품을 공급받던 각 지역의 도매상부터 장마당에서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하는 말단 장사꾼까지 연쇄적인 영향을 주었다.

집에서 침과 뜸을 활용하는 한방 치료법으로 환자들을 치료하는 개인 사업을 영위했던 김명옥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게)치료받았던 사람들이 돈 좀 있다하는 사람들이었는데, 몽땅 아우성이었어요. 국경 봉쇄하면서 상품이 아예 싹 다(사라졌어요). 장마당이 휑했지”

봉쇄가 지속되고 상품 공급이 막혀 거래가 멈추자 시장의 사슬에 연결돼 있던 사람들이 무더기로 생계수단을 잃었다. 사회는 공황상태가 되고 사람들은 어찌할 바 몰라 갈팡질팡했다.

이어지는 기사에서는 봉쇄가 초래한 경제적 어려움에 더해 당국의 무자비한 방역 정책이 주민들에게 어떤 고통을 강요했는지에 대해 알아본다. (계속>>)

북한 지도 제작 아시아프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