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칠흑의 4년을 비추다> (1) 거의 유일한 탈출 루트 - 바다를 넘어온 신세대 돈주들이 말하는 코로나, 혼란, 사회변화
국경 봉쇄로 인한 물품 부족과 가격 상승이 북한 주민에게 강요된 첫 번째 고난이었다면, 당국의 무자비하고 무분별한 방역 정책은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고 생계를 위협하는 두 번째 고난이었다. 이번 기사에서는 당국의 방역 정책과 그것이 주민의 삶에 끼친 영향에 대해 살펴본다. (전성준)
◆ 얼어붙은 생산과 유통, 인도적 위기의 징후
코로나바이러스의 유입과 확산을 막기 위한 당국의 도를 넘은 방역 조치는 국경 봉쇄로 인한 혼란을 가중했다. 바다를 통해 코로나바이러스가 유입될 것을 우려한 당국은 ‘방역 조치’의 일환으로 어업 활동을 전면 금지했다. 선주로 어선을 운영했던 강규린(여, 23세, 가명) 씨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바닷물에 띄웠던 배들을 육지에 다 끌어 올렸어요. 결국 나중엔 그걸 다 없애라고 했거든요. (배 만드는데) 사람들 돈이 엄청 들어갔잖아요? 그런데 보상도 안 해주고 그걸 다 까버린 거죠”
한편 서해 쪽에서는 당국이 해안선에 접근 자체를 금지하면서 많은 배가 태풍에 부서졌다고 김충열 씨는 말한다.
“닻줄을 조금만 손질해줘도 괜찮았을 텐데… (해안선에 접근하면) 총으로 쏘라고 명령이 떨어졌으니까 친한 해안경비대 군인들이 막 부탁을 하는 거예요. 제발 (바다에) 나가지 말아 달라고”
게다가 바이러스를 차단한다며 이동까지 통제하면서 상품 유통을 위한 운송도 마비됐다. 김충열 씨는 당시를 “그냥 악몽이었다”고 기억한다.
이 시기 벌써 인도적 위기의 징후들이 포착되기 시작했다. 아시아프레스는 2020년 7월 15일 혜산, 신의주, 회령, 청진 등 북부의 주요 도시를 대상으로 한 내부 조사를 소개하면서 인도적 위기의 징후를 경고한 바 있다. 장마당과 역전에 꼬제비(꽃제비)가 늘어났고, 도시의 집을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가는 도시 지역 사람들이 생겼으며, 생활고로 인한 기혼 여성의 성매매 현상이 많아졌다고 내부의 협력자들은 전했다.
<북한내부조사> 전국에서 걸인, 노숙자, 기혼여성 성매매 증가, 도시 주민은 도망까지... 코로나로 경제 악화 심각
이해 가을에는 농촌으로 이삭줍기나 구걸을 하러 떠나는 도시 주민의 행렬이 눈에 띄게 늘었다. 이는 방역 정책으로 인해 유통이 정체되고 도시 주민들의 현금 수입이 격감하면서 생긴 현상이다.
◆ 이 정도일 줄이야, 국가에 불만 증폭
이 시기, 국가와 지도자에 대한 주민의 인식도 크게 바뀐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경제는 바닥이다, 이렇게 인식을 가졌죠” 강규린 씨의 말이다.
“국산 식료품 가격도 엄청 오른 거예요. 과자는 국산인데 왜 오르냐 하니까, 정말 순진하구나, 국산이 어디 있냐고. 포장지부터 재료까지 다 수입해서 글자만 바꾼다는 거예요. 뭐야, 과자도 못 만들면서 우리 거라고 거짓말로 홍보했나? 이러면서 사람들 인식이 나빠졌죠”
팬데믹이 북한 사람들을 가장 크게 바꾼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김충열 씨는 1초도 망설임 없이 ‘국가에 대한 불신’이라고 답했다.
“원래 못 사는 거는 다 알고 있는데, 이 정도일 줄은 정말 몰랐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어요”
김명옥 씨는 “이전에는 (지도자가) 경제를 발전시킬 거라는 기대가 있었는데 코로나를 겪으면서 김정은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100% 전환됐다”고 말했다.
팬데믹은 자신의 삶과 미래에 대한 주민들의 태도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김충열 씨는 코로나 시기를 겪으며 탈북 결심을 굳혔다고 말한다.
“난 그냥 내 사람들 데리고 잘 사는 걸 원했거든요. 북한 본질에 대해서 모른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 땅에서 잘 살면 되는 거지라는 생각이었는데, 코로나 때 보니까 참 나라가 희한한 거예요. 그래서 거 뭐 고향이라는 미련으로 살다가 내 자식들도… 안 되겠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 ‘방역은 수령보위’ 바이러스보다 무서운 국가
당국은 주민 사이에서 속출하는 불만에 강력한 처벌과 통제로 대응했다.
2020년 8월 말, 북한은 사회안전성(경찰청) 명의로 국경 봉쇄에 지장을 주는 행위에 대해 철저히 처벌하겠다는 포고를 공포했다. 포고에는 ‘압록강, 두만강의 우리측 강안에 침입한 대상과 짐승은 예고 없이 사격한다’고 명시됐다. 이와 함께 야간통행금지 기간을 설정하고, 하기에는 20시~5시, 동기에는 18시~7시까지 사람과 차량의 통행을 금지했다.
<북한 내부문서 입수> '국경에 접근하는 자는 무조건 사격' 경찰포고문 전문 공개... 무자비한 코로나 대책
당국은 또한 기관, 기업소를 통한 감시와 통제도 동시에 강화했다.
팬데믹 시기 수산기지 선단장으로서 김충열 씨의 임무는 첫째로, 당국에 대한 선원들의 동향을 감시, 파악해서 보고하는 것이었다. 둘째로는 당에서 내려오는 정책을 제때에 선원들에게 전달, 침투 및 집행하는 것이었다. 수산물 생산은 뒷전으로 밀렸고 환자에 대한 돌봄이나 관리는 그 다음 순위였다.
“사회 분위기가 병 걸린 것 자체로 역적 취급을 받는 느낌이었어요. 방역 사업을 수령보위와 직결시켜 주변 사람들이 마구 처벌되니 참 무서웠죠. 웬만하면 (징역)5년, 좀 무겁다 싶으면 10년이었으니까 제발 나는 걸리지 않았으면 했었죠”
주목을 끄는 것은 당국이 코로나 방역을 ‘최고 존엄’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과 연결해 주민들을 탄압에 정당성을 부여했다는 점이다.
당시 사회안전성(경찰청)에 근무했다는 지인은 김 씨에게 방역 규정을 어겨 처벌된 간부가 안전성 내에만 600여 명에 이른다고 주의를 주었다고 한다. 당시는 북한에 바이러스가 확산하기도 전이었던 걸 감안하면 사람들이 바이러스 이상으로 국가의 처벌을 두려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듯하다.
분명한 것은 코로나바이러스가 미처 북한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북한 주민들의 고통은 시작됐는 것, 그리고 그 고통이 결코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음에는 주민의 밥그릇을 뺏으려는 당국의 반시장 정책이 어떻게 주민들을 더 큰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는지를 살펴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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