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EEZ 부근에 출현한 북한 목조선. 2018년 7월 하순 (해상보안청 제공)
<북한 칠흑의 4년을 비추다> (1) 거의 유일한 탈출 루트 - 바다를 넘어온 신세대 돈주들이 말하는 코로나, 혼란, 사회변화

시리즈를 마무리하며, 북한 경제에서 주요 분야라고 말할 수 있는 수산업과 농업이 팬데믹을 통해 어떻게 변했는지를 2회로 나누어 알아본다. 본 기사에서는 북한의 서해와 동해에서 개인 어선을 운영하던 김충열(2023년 5월 탈북), 강규린(2023년 10월 탈북) 씨의 경험을 통해 북한 수산업의 현황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전성준)

◆ 북한 수산업의 구조

농업과 더불어 수산업은 북한 경제에서 실질적으로 생산이 유지되는 몇 안 되는 분야다. 팬데믹 이후의 북한 수산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북한 수산업의 구조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 둘 필요가 있다.

1980년대 ‘충성의 외화벌이 운동’으로 불리는, 전국적인 통치 자금 조성 및 상납 캠페인이 벌어졌다. 각 기관은 당으로부터 할당받은 외화 과제 수행을 위해 외화벌이 원천 확보에 나섰다. 일본과 중국 등에서 수요가 높았던 북한의 값싼 수산물은 매우 중요한 외화벌이 자원이었다. 이후 동서해안을 따라 당, 군, 정 및 주요기관 산하의 수산기지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이러한 배경은 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이후 수산업이 그 어느 분야보다 빨리 시장화 되는데 기여했다. 국가 경제가 붕괴 직전에 이른 상황에서 주로 트롤어선에 의지하던 어로 방법은 지속하기가 어려워졌다. 어선의 수리보수가 어려워졌고, 연료 보장도 쉽지 않았던 것이다.

이 시기 개인이 작은 목선을 이용해 잡은 물고기를 시장에 판매하는 방식의 어로 방법이 확산했는데, 이는 선주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2000년대를 거치며 북한 전역의 해안에서 선주들의 활약은 눈부셨다. 선주들은 어업으로 축적한 자본을 투자해 배 크기도 키우고 인력으로 노를 젓던 동력을 엔진으로 대체하는 한편, 사람을 고용해 주변을 먹여 살리는 역할을 했다.

그 후 당국은 날로 커지는 선주의 영향력을 경계해 그들을 국가의 통제 하에 두려는 노력을 지속했는데, 특히 김정은 시대에 들어와 많은 선주들은 군이나 보위부 등 권력기관 산하의 수산기지에 개인 어선을 등록하고 어업활동 수익금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단속을 피해왔다.

팬데믹 시기는 선주들에게 가혹한 시기였다. 김정은 정권이 방역을 이유로 바다까지 봉쇄하면서 목선들은 수년간 육지에 올려진 채로 말라비틀어져 못쓰게 되었다. 많은 선주가 이 시기를 지나며 자신의 배를 잃고 더 이상 선주가 아니게 되었다. 배가 있다하더라도 어업권을 보장해주는 특정 권력 기관의 비호를 받기 위한 경쟁에서 밀려 결국 영세 어민으로 전락했다. 김충열 씨와 강규린 씨는 그 속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선주다. 그들이 선주가 되고 팬데믹 속에서도 선주로 살아남은 비결을 통해 현재 북한의 수산업의 실태를 알아보자.

◆ 돈 있다고 다 되는 게 아냐 - 김충열 씨가 말하는 선주 되는 법

서해안 출신인 김충열(33) 씨는 탈북 전 황해남도 해주 인근의 수산기지에서 150여 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선단장이었다. 그는 국가 소유로 등록된 배 3척의 실질적 소유자이기도 했다. 어선을 만들고 운영하는 과정을 물었다.

김충열 씨

Q: 국가기지 산하에서 배를 운영했다고 들었습니다.

김충열: 제가 운영하던 어선은 국가 소유로 등록됐지만, 실제 주인은 저였어요. 제 개인 자금으로 배를 지었거든요. 선단에 배 10척이 있었는데, 다른 배들도 다 선주는 개인이었고, 명의만 국가 거였어요. 고기를 잡으면 생산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고 기업소에는 수익금을 내는 방식이에요. 나는 대신 기업소 명의로 어장에서 작업할 수 있게 되는 것이고요. 탈북하기 직전 기준으로 보통 하루 나가면 (매상으로)200~300달러 정도(순수익 약 50달러 정도)는 벌었어요.

Q: 어선은 어떤 방식으로 취득할 수 있나요?

김충열: 저 같은 경우는 배를 새로 만들었어요. 먼저 해주에 가서 목재를 사야 합니다. 75마력 배는 통상 목재가 70입방미터(m³) 정도 듭니다. 입방 미터당 55달러 정도 하죠. 그럼 4,000달러 정도가 목재값으로 듭니다. 그런 다음 '동력직장'이라고, 배 전문 짓는 공장에 가서 한두 달 맡기면 됩니다. 거기에 인건비로 800달러를 줘야 해요. 그동안 인부들 식대며 기타 비용으로 500달러가 더 듭니다. 이렇게 뱃값만 5,000달러 정도 됩니다.

Q: 그 외에 어떤 비용이 더 드나요?

김충열: 각종 허가증 내는 데 돈이 많이 듭니다. 먼저 배를 짓는 부지 사용료로 150달러를 내야 합니다. 그리고 해사감독소에 신조허가를 받는데, 뇌물로 500달러쯤 줘야 합니다. 그 외에도 전파허가증, GPS등록증 등 잡다한 증명서를 받는 데 150달러씩 듭니다.

※ 해사감독소는 해상의 국제규약을 준수하고 해상의 안전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선박들의 활동을 감독하는 기관이다.
※ 군사동원부는 국방성 조직동원보충국(이전 대열보충국) 산하 병역 사무 전담 부서로 각 도, 시, 군에 설치돼 해당 지역의 신병 모집 사업을 진행한다.

군사동원부에도 선박을 동원대상으로 등록해야 합니다. 유사시에 군수물자를 나른다는 명목이죠. 이때 드는 군사등록증도 10만 원(북한 원화) 정도 줘야 해요. 안 그러면 나중에 출항할 수가 없어요.

그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건 '이동작업증'을 받는 일이었어요. 이건 어업작업 구역을 옮기려면 군부에서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한 척당 800~900달러는 줘야 했죠. 돈 있다고 다 되는 건 아닙니다.

Q: 그럼 75마력 어선 한 척에 총 얼마가 드나요?

김충열: 제 경험으로는 어구자재까지 다 합쳐 1만 7~8천 달러는 들었던 것 같아요. 배만 1만 3,000달러 정도. 웬만큼 돈이 없으면 배 한 척 만들기도 쉽지 않은 셈이죠.

◆ 실리를 위해선 중앙당과도 싸워 - 강규린 씨의 동해안 조업기

강규린(23) 씨는 작년 10월 함경남도의 한 포구에서 가족과 함께 탈북선을 탔다. 탈북 전 그녀는 22마력 어선을 운영하며 잠수부들을 고용해 조개를 잡았다. 북한의 연안 수산업, 특히 수산물 유통의 내막을 물었다.

강규린 씨

Q: 어떻게 어업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강규린: 처음에는 배를 할 의향도 없었고, 또 잘 아는 분야도 아니었는데, 선주 경험이 있는 당시 남자친구가 벌이가 괜찮으니 자꾸 같이 해보자고 해서 엄마에게 돈을 빌려 시작했어요. 그런데 한 달도 못돼서 선주는 나인데 자꾸 이래라저래라 간섭받는 게 자존심이 상하더라고요. 결국 이제부터 내가 직접 할 테니까 넌 여기서 손 떼라하고 제가 혼자서 하게 됐어요. 첨엔 아무것도 모르니까 돈이 엄청 깨졌어요. 그러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다 보니 점차 배 사정을 좀 알게 되면서 돈을 벌게 됐던 거 같아요.

Q: 주로 어떤 방식으로 어획을 했나요?

강규린: 중앙당 산하의 기지에 등록하고 작업했는데, 우린 주로 조개를 잡았어요. 조개가 수출됐거든요. 제 배가 22마력이었는데, 잠수부들이 들어가 물질을 하는 방식이었죠. 오징어잡이를 하려고 준비한 적도 있는데, 막상 오징어가 안 잡혀서 포기했죠.

Q: 생산물은 어떻게 배분했나요?

강규린: 우리 지역에서는 처음에 기지에 40%를 바쳤어요. 그런데 배 20척 가까이 되는 선주들이 단합해서 국가랑 싸웠어요. 우리가 이렇게 뼈빠지게 일해서 바치는데, 잠수사고 나면 보상도 안 해주고, 기름값은 또 얼마나 드는데... 그래서 투쟁해서 처음에는 30%, 결국에는 20%까지 낮췄죠.

Q: 국가라면 기지와 싸웠다는 건가요?

강규린: 아뇨, 중앙당에서 사람이 직접 내려와요. 그때는 기지장도 우리 편이에요. 왜냐하면 기지장도 우리가 작업을 안 하면 계획을 못하게 되는 거가 되니까, 계획을 못하면 잘리거든요. 근데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람도 결국 우리가 돈 벌어주는 거니까 우리 요구를 무시 못하죠.

Q: 선주 입장에서는 수입 대 지출이 어떻게 되나요?

강규린: 보통 한 배에서 하루 100만 원어치를 잡아오면, 20% 세금 빼고 기름값, 식대 이런 거 다 빼면 60~70만 원이 선주 몫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배 유지비랑 잠수부 인건비를 또 떼야 하죠. 그렇지만 초기투자가 약 6천에서 7천 불 정도 드니까 그걸 뽑으려면 시간이 걸리죠.

Q: 잠수부 인건비는 어느 정도인가요?

강규린: 잠수공 보수는 만약에 조개를 판돈이 100만 원이였다면 계획 바치고 기름값 떼고 반씩 나눠요. 예를 들어 20만 원 세금, 20만 원 기름값 빼면 60에서 그 반인 30만 원을 제가 챙기고 나머지 30으로 함께 작업한 잠수공들이 다시 나누는 식이에요. 3명이 작업했다면 10만씩 갖게 되는 거죠.

Q: 잠수부는 어떻게 구하나요?

강규린: 돈 주고 사요. 잠수부가 기술이 좋아야 선주가 돈을 벌 수 있는 구조거든요. 처음에는 그걸 모르고 아무 잠수부나 썼다가 손해를 많이 봤어요. 기능이 없어도 자기 기술이 높다고 하는데, 생산물 보면 딱 알거든요. 그러면 그 사람에게 이대로는 안 될 것 같다고, 다른 배 찾아보라고 단호하게 말을 하죠.

그래서 좋은 잠수공을 구하려고 잠수부 빚을 대신 갚아주고 데려오기도 해요. 700만 원까지 주고 모셔온 적도 있어요. 나중에는 여비까지 다 주면서 서해 쪽에서 구해오기도 했어요. 실력만 있으면 '비노력'이라도 쓰거든요.

Q: 비노력은 뭔가요?

강규린: 비노력은 말 그대로 허가받지 않은 사람을 데려다 쓰는 거예요. 제가 서해안에서 잠수 잘하는 사람을 데려오려면, 가짜 문건을 만들어 줘야 해요. 대신 생산을 잘 해주니까, 그렇게라도 데려와야 하죠. 나중엔 보위부에서 수배까지 내린 서해 쪽 사람까지 썼다니까요. 돈만 된다면 상관없어요.

Q: 21살에 처음으로 배 운영을 시작하셨는데,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강규린: 주변에 배 운영하는 사람들은 다 남자들이었고 주로 27살 총각 선주들이 많았는데, 그 사람들도 정말 어려워해요. 선주가 말처럼 쉽지 않거든요. 그래서 처음에 시작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저 보고 다 다른 거 하라고 말렸어요. 어린 데다가 여자가 혼자서 선주 안 된다고 사람들이 비꼬기도 했는데, 제가 세상에 안 되는 거 없다고, 내가 되는 거 보여주겠다고 그랬어요. 그때는 다 웃었어요.

근데 그 이후에 실적이 말해주니까. 선주들 사이에도 경쟁이 있거든요. 한 6개월 이후부터는 제가 항상 1, 2등을 했어요. 우리 기지장이 나한테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고 그랬어요.

Q: 그 외 조업하면서 또 다른 어려움이 있었나요?

강규린: 단속이 제일 힘들었어요. 바다에 나가서 고기 잡는 게 힘든 게 아니에요. 잡으면 돈이 되니까요. 그런데 육지도 그렇지만, 해상에서도 단속이 너무 심해요. 다양한 검열대가 있는데, 배 문건 하나만 잘못돼도 다 뒤져요. 그리고서 생산물 다 빼앗아 가요. 기름값이고 뭐고 다 공치는 거죠. 문건 하나 잘못됐다고 엔진을 떼어가요, 배를 압수하기도 하죠. 그럼 또 돈 200~300달러 주고 찾으러 가야 해요.

근데 그보다 더 어려웠던 건 수출이 막히는 거죠. 보통 조개는 중국으로 수출되는데, 그게 막힐 때마다 가격이 폭락하니까, 제일 불안하게 하는 게 그거죠. 검열대에 단속되면 돈 주고 해결할 수 있는데, 수출은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두 사람의 증언은 불과 1년 전의 상황으로, 팬데믹 이후에도 사회주의 수산업 전반에 만연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실상에 대해 잘 보여준다. 동시에 어업 현장의 역동성과 돈주들의 기업가 정신, 그리고 냉철한 노동시장과 노동조합의 맹아까지도 엿볼 수 있다.

다음 회에서는 북한 농촌 경제의 실상에 대해 살펴본다. (계속)

북한 지도 제작 아시아프레스
<북한 칠흑의 4년을 비추다> (7) 팬데믹이 초래한 당국의 재정 위기와 그 출로2 - ‘세금 없는 나라’의 세금 수탈, ‘아궁이세’까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