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칠흑의 4년을 비추다> (9) 사회주의 지붕아래 깃든 자본주의 유령 1 국영기업의 개인 선주부터 중앙당과 협상하는 ‘노조’까지… 선 넘는 선주들
김충열 씨는 황해도 해주 인근의 무역회사 소속 수산기지에서 선단장으로 일하는 동안, 종업원들의 배급 양곡을 마련하기 위해 인근 협동농장에서 토지를 대여해 큰 규모로 농사를 지은 경험이 있다. 황해도는 연백평야와 재령평야 등을 낀 북한의 최대의 곡창지대로서 특히 벼 생산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가 경험한 북한의 농촌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협동농장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모습에 더 가까웠다. 김 씨의 증언을 통해 북한 농촌 경제의 현주소를 들여다본다. (전성준)
◆ “국가계획 대신해주마” 거부할 수 없는 제안
Q: 농장 땅을 대여해서 농사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나요?
김충열: 보통 협동농장의 한 개 작업반이 관리하는 땅이 30정보(약 30ha)쯤 됩니다. 그런데 국가에서 비료며 영농자재를 제때 공급을 못 해주니 작업반장이 그 땅을 다 관리를 못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국가 계획에도 차질이 생기죠. 그러면 인근 도시에서 자본이 좀 있는 사람들이 작업반장한테 찾아옵니다. 농사에 필요한 자금을 대주는 대신, 땅을 좀 대여해 달라, 그러면서 작업반에 할당된 '국가 계획분'의 일부를 떠맡겠다고 제안하죠.
Q: '국가 계획분'은 어떻게 정해지나요?
김충열: 작업반이 관리하는 토지 면적에 평당 수확량을 곱해서 정해집니다. 1평당 수확량은 보통 0.8kg에서 1.27kg 사이예요. 그런 방식으로 북한 전역의 협동농장에 계획량이 할당돼요.
Q: 합의가 성사되면 그 다음엔 어떻게 되나요?
김충열: 계약금(영농물자나 돈, 혹은 연료)을 받은 작업반장은 그해의 영농 권한을 계약자에게 넘겨요. 농사에 필요한 비료, 종자, 농기계, 인력 같은 건 계약자가 자기 책임하에 조달하는 거죠. 심지어 작업반원들의 임금이나 식사까지 계약자가 책임져야 해요. 대신 국가에 바칠 몫만 제하고 나머지 수확량은 다 계약자 차지가 되는 거죠.
Q: 협동농장에서 개인이 직접 농사를 짓는 게 언제부터 시작됐나요?
김충열: 정확한 시기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과거부터 계속 있었던 일이예요. 특히 2020년 코로나 사태 이후로 더 활발해졌죠. 국가에서 비료도 종자도 제대로 공급을 못 하니까, 농장에서 제대로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점점 더 개인한테 땅을 주고 알아서 경작하게 하는 게 일반화됐어요.
◆ 수백 명이 붙어서도 못하던 계획, 개인이 두 배로
Q: 땅을 받은 개인은 어떻게 농사를 짓나요?
김충열: 농사를 하는 건 작업반에 속한 농장원들이에요. 계약자는 작업반장에게 한 해 농사에 필요한 인원을 넘겨받아서 자기가 관리해요. 저 같은 경우엔 농사 기술자 한 명하고 농장원 세 명을 골랐죠. 이들에겐 일당으로 하루 3,000원(북한 돈)을 줬어요. 옥수수 1.5kg 정도예요. 여기에 점심 식사까지 제공했죠. 일당으로만 보면 적다고 할 수도 있는데, 농장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죠. 게다가 국가 과제나 각종 동원에서도 빠질 수 있으니 농장원 입장에서는 보수 없이 국가일 하며 시간만 때우는 것보다는 훨씬 낫죠.
그 외에 일손이 많이 필요한 시기에는 다른 농장원들을 품앗이로 사서 써요. 이들에게 일당을 주는 거죠. 점심 한 끼 국수 배불리 먹이고. 모내기 같은 때는 80명에서 100명까지도 사서 하루에 다 끝내버려요. 국가일을 할 때는 사람들이 대충해도 문제가 안 되지만, 이 경우는 다르죠. 즉시 돈을 받잖아요.
Q: 수확률은 어떻게 되나요, 그리고 수확물을 어떻게 배분하나요?
김충열: 계약자가 작업반에서 떠맡은 국가 계획량을 제하고 나머지를 다 가져가요. 저 같은 경우에는 순이익으로 쌀 10t 정도가 남았어요. 남은 걸 다 갖는 건 아니고 검열이 되게 많거든요. 검열 내려오는 사람들 많거든요. 그놈들 뇌물로 뚝뚝 아깝지 않게 잘라 줘야 탈이 없거든요. 데리고 있는 사람들 배급으로도 주고, 나머지가 제 거죠.
◆ 누이 좋고 매부 좋은데, 국가는 왜?
Q: 농장 간부들에겐 어떤 이익이 있는 건가요?
김충열: 농장 간부들은 위에서 내려온 계획량만 채우면 돼요. 군량미 계획이요, 국가계획이요, 계획량에 숨이 찬데 내가 알아서 생산해서 바치니까, 간부들은 땅 관리하랴, 노동자 통제하랴 이런 것에서 손을 떼고 편하게 있을 수 있죠. 농사 자금이나 물자가 없어서 계획량을 못 채울 걱정도 없고요. 게다가 계약을 따낼 때 뇌물이 또 많이 들어가거든요. 그러니 농장 간부들한테는 딱 좋은 거예요. 그 숱한 농장원이 달라붙어도 못하던 계획을 개인이 붙는 순간 두 배를 해요. 국가 입장에서도 좋은 거죠.
Q: 본인이 생각에 이런 현상이 북한 전반으로 볼 때 얼마나 보편화 되었나요?
김충열: 전국적으론 잘 모르겠는데, 황해도가 원래 벌이 많거든요. 그래서 황해도 쪽에서는 이게 좀 많이 유행을 하고 있죠. 저 같은 경우는 오히려 별게 아닌 게, 돈 좀 많은 개인이 군당 책임비서나 경영위원장한테 내가 이 작업반 계획 몇 백 톤이면 그걸 다 하겠으니까 농장원들 다 나한테 붙이고 일체 간섭하지 말아달라 하는 경우도 있거든요. 좀 놀랐던 게 벽성(황해남도 벽성군) 쪽에서는 한 개 리를 그런 식으로 개인이 통째로 운영해버리고 마는 경우도 있었으니까요.
Q: 당국은 이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고 있나요?
김충열: 2022년경에 '로력착취죄'라는 걸 대대적으로 선전했는데, 개인이 농장원을 고용해서 농사를 짓는 걸 처벌하겠다는 거예요. 국가가 농민들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대가는 안 주는 건 괜찮고, 개인이 품삯을 주고 일을 시키는 건 안 된다는 거죠. 앞뒤가 안 맞는 처사예요. 그런데 단속을 피해 가는 방법은 많아요. 간부들 입만 잘 막으면 별 문제없이 할 수 있어요.
김충열 씨의 증언은 북한 농촌에서 진행되고 있는 자생적 시장화의 역동성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북한 당국의 갖은 단속과 통제 속에서도 주민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새로운 경제 질서를 만들어가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움직임이 단순히 배고픔을 면하기 위한 생존의 몸부림을 넘어, 북한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동력이 될 수 있을지 지속적인 주시가 필요해 보인다.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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